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1절을 '건국의 기념일'로 최대 국경일로 기념하였을 정도로 기미년(己未年)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 조상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과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3·1절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주장처럼 미국의 독립기념일, 프랑스의 바스티유 데이, 중국의 쌍십절과 같은 국가와 민족의 최고의 기념일인 셈입니다.
1919년 당시 한반도의 인구는 천육만 정도였는데 그 중에 개신교인의 수는 전체인구의 1.5%에 불과한 약 24만명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적은 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인 기독인사였으며, 같은 해 6월까지 투옥된 자 9,458명 중 개신교인은 2,087명으로 중간 지도자층의 22%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투옥자는 거의 개신교인이었습니다. 당시 9월에 평양에서 장로회 총회가 열렸는데, 장로교인 사망자가 52명, 투옥자가 3,804명이었으며, 목사와 장로 1,024명 가운데 13%인 134명(총회장 김선두 목사, 길선주 목사 포함)이 감옥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당시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3·1 운동의 거사 및 전국적 전개과정에서 기독교는 기독교회와 선교학교를 통해서 만세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을 일반 민족운동을 너머선 기독교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19년은 한반도에 복음이 전파된 지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지만 당시 조선 각지에 생겨난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써 참 역할을 하였기에 조선 땅의 한민족 사이에서 일생에 한번 추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역사의 한 정점에서 3·1 운동을 시작으로 기독인사들은 물론 소수의 기독교인들까지도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한 알의 밀알로써 자신들에게 내재된 영적인 에너지를 포기할 수 없는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로 방출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기독인사들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독립을 걷으러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들어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미년(己未年) 3·1 운동은 거룩한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대교회의 성도는 거두려는 기쁨만을 누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심지 않으면 절대로 거두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3·1 운동 속에 깃들여 있는 기독정신을 본받아 다음세대가 기쁨의 열매를 걷도록 눈물로 씨를 뿌리는 수고를 실천할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