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은 기독 신앙의 요약문입니다. 사도신경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도(使徒)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하여준 고백을 기초로 박해가 끝난 후에 교회들이 모여서 정리한 것입니다.
박해가운데에서도 초대 교회 안에는 이단과 거짓 가르침이 난무했습니다.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혹은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인성을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는 이들이고 신성을 부인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을 이단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을 담은 신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십자가 모양의 구름을 보고 전쟁에 승리하였다고 합니다.1) 그 후 그는 공식적으로 첫 번째 “크리스천” 로마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성도들을 이단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가 기독 신앙의 핵심 신조를 필요로 하자, 첫 번째 크리스천 황제로 자부하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325AD경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이후 사도신경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의 에베소 회의’, ‘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쳐 수정되면서 지금의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이 처음 니케아 종교회의와 유사하기에 사도 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도신경은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사도신경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끝 부분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현대 교회가 모든 공모임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이유는 이단과 구별되게 믿음을 고백하며 이 땅에 이미 출범한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재림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유지하고자 함입니다.
1) 로마 시민 가운데 정결한 처녀가 없었기에 순결한 크리스천 여인인 헬레나Helena를 통해 낳은 아들이 바로 콘스탄틴Constantine이었다. 콘스탄틴이 AD312년 10월 28일 그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로마의 막센티Maxentius와 밀비안Milvian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해를 쳐다보았을 때, 콘스탄틴은 십자가의 빛과 함께 ‘십자가와 함께 싸워 정복하라!’는 글자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 넣게 하여 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 승리한 콘스탄틴은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의 지위를 굳히고, AD313년에 공동황제 리키니Licinius와 함께 밀라노Milan 칙령을 발표하여 로마제국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했다.